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우구스투스 영묘 (문단 편집) == 안장자들 == 아우구스투스가 영묘를 건설한 목적이 자신과 후손들이 묻힐 무덤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고, 국립묘지 개념보다는 엄밀한 의미에서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일가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가문 사람들이 묻힐 가족 공동무덤이었다. 따라서 후대 로마 황제들은 해당 무덤에 무조건 묻히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아예 새로운 [[하드리아누스 영묘]]를 건설했다. 영묘에 가장 먼저 안장된 사람은 아우구스투스가 아니라 그의 조카이자 사위였던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아우구스투스의 조카)|마르켈루스]]였다. 아들이 없었던 아우구스투스가 후계자로 염두에 둔 사람인데다가 젊은 나이에 로마를 휩쓴 전염병에 걸려 어이없게 요절했기 때문에 황제의 슬픔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갓 완공된 영묘에는 마르켈루스의 유골을 안장했다. 두 번째 안장자는 아우구스투스 평생의 친구이자 조력자였으며, 그의 사위가 되어 외손자들을 낳아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였다.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의 상속자이며 양자로 2대 황제가 되는 [[티베리우스]]의 장인이자 그의 군사,행정 실무를 가르친 스승이기도 했으며, 두 외손자의 친부인데다 사망 전 호민관 특권을 받은 상태였다. 이런 인간적 관계, 국가서열 등의 이유로 아그리파 사망 직후, 아우구스투스는 18살의 나이부터 늘 함께 한 친구의 죽음을 슬퍼했고 국장으로 열린 엄숙한 장례식 후 아그리파의 추모는 국가애도기간으로 결정되어 한달간 엄숙히 집행됐다. 그리고 세 번째 안장자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가 첫 남편 사이에서 얻어 낳은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대 드루수스]]다. 그는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친동생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이면서 조카 사위로 아그리파 생전부터 아우구스투스가 마르켈루스 이후 차기황제로 낙점한 후계자였다. 그러나 드루수스는 게르마니아 정복을 거의 완성한 뒤, 현직집정관 신분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지원 아래 개선식을 거행하기 직전 29살의 한창 나이에 낙마사고 후유증으로 요절했다. 따라서 연이어 세 명의 후계자들을 떠나보낸 아우구스투스는 하늘에 대고 신을 원망하며 울분을 토할 정도로 크게 좌절했다. 특히, 누구보다 아낀 양자 드루수스 사망에 큰 충격을 받은 황제는 황후와 함께 이 일로 심리치료를 받을 정도로 낙담해, 황궁 곳곳에 죽은 양자의 살아생전 크기의 조각상을 놓고 대화를 나누며 떠나보낸 드루수스의 빈자리를 극복했다고 한다. 조카, 친구이자 사위, 양자이자 조카사위를 연이어 떠나보낸 아우구스투스는 이후 양자로 일찍히 입적시킨 두 외손자 루키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먼저 떠나보냈고, 양자 [[티베리우스]]를 정식입적 후 공동황제로 승격시킨 뒤에야 자신이 만든 이 영묘에 묻혔다.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안장 후 영면에 든 이들은 당시 로마인들의 장례 문화에 따라 매장됐다. 따라서 황제와 황후, 황족들은 사망 후 정식 장례식 후 추모식을 거쳐 화장되었고, 납골 항아리[* 과거에는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안장된 로마 황제, 황후, 황족들의 유골항아리처럼 황금으로 제작되었다고 추정됐으나, 2021년 관광객들에게 첫 공개된 유골항아리는 놀랍게도 로마 시대 귀족이나 기사계급 출신들이 많이 사용한 대리석 등으로 만들어진 제품이었다. 참고로 2021년 복원 이후 공개된 유일한 유골항아리의 주인공은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게르마니쿠스&클라우디우스 형제의 외할머니 소(小) 옥타비아의 것이다.]에 담겨졌다. 이 과정에서 황제 혹은 남성황족들이 대표로 로스트라에서 고인을 추모한 것에 그치지 않고, 아우구스투스의 양자 드루수스(대)의 사례처럼 황제가 살아생전 인간됨과 업적을 기리는 헌정시와 비문도 함께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드루수스 사망 후 납골묘 구성 기록에서 드러나듯, 로마 제국과 황제, 원로원 차원에서의 헌사 혹은 추모도 따로 집행된 것으로 보이며, 황제가 개인적 차원에서 따로 방문한 것으로도 보인다. 건물 구조를 살펴보면 총 3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구조로 건물 가운데에는 아우구스투스의 자서전인 《업적록》이 적힌 청동판 등이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영묘 심장부에 있는 방은 황제들 외의 안치자들의 매장실로 이용됐다. 이 매장실은 추모실을 거쳐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나오며, 그 위를 통해 마련된 건물 형태의 공간에는 아우구스투스와 그 후임 황제들의 유골항아리가 영면해 있던 것이 재개장 전 복원 공사 중 확인됐다. 2021년 3월 1일 재개관에 앞서 추가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를 비롯해 티베리우스, 가이우스(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는 다른 남녀황족들과 같은 유골항아리 매장실을 사용하지 않고, 아우구스투스의 동상 아래에 위치한 가장 높은 매장공간에 안치됐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또한 아우구스투스 직계 남녀황족들의 유골항아리는 석회를 발라 매장실에 안치된 이후 쉽게 훼손되지 못하게 보호 작업을 한 것으로 확인됐으며, 하드리아누스 영묘와 달리 아우구스투스 영묘 안장자들은 그들의 비문, 업적 소개와 추모 내역을 비롯해 황족들의 유골항아리, 매장 장소도 공개됐다. 아래 정리된 안장자들은 기록상 신원이 명확하게 확인된 황제, 황후, 황족들이다. 참고로 비고에 설명된 인물간 관계는 혈연관계 기준으로 기술됐으며, 황제의 경우 굵은 글씨로 표시하겠다. ----- ||<#DCDCDC> 안장자 ||<#DCDCDC> 출생 ||<#DCDCDC> 사망 ||<#DCDCDC> 비고[* 입양관계를 제외한 혈연관계 기준]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BC. 42년 ||B.C. 23년 ||아우구스투스의 조카 겸 사위 ||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B.C. 63년 / 64년 10월 / 11월 23일 ||B.C. 12년 ||아우구스투스의 사위, 티베리우스의 장인, 드루수스(소)의 외할아버지, 칼리굴라의 외할아버지 ||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드루수스(대)) ||B.C. 38년 / 23년 3월 ||B.C. 9년 9월 14일 ||티베리우스의 동생, 리비아 드루실라의 차남, 아우구스투스의 조카 사위, 옥타비아(소)의 사위, 안토니아(소)의 남편, 게르마니쿠스와 클라우디우스의 아버지, 칼리굴라와 브리타니쿠스의 할아버지|| ||[[소 옥타비아]] ||B.C. 69년 ||B.C. 11년 ||아우구스투스의 누이, 안토니우스의 아내, 게르마니쿠스와 클라우디우스의 외할머니 || ||[[가이우스 카이사르|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B.C. 20년 ||4년 2월 21일 ||아그리파의 장남, 아우구스투스의 외손자 || ||[[루키우스 카이사르|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B.C. 17년 ||2년 8월 20일 ||아그리파의 차남, 아우구스투스의 외손자 || ||'''[[아우구스투스]]''' ||B.C. 63년 9월 23일 ||14년 8월 19일 ||'''로마 제국 초대 황제''' ,'''리비아 드루실라의 남편''' || ||[[게르마니쿠스|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B.C. 15년 5월 24일 ||19년 10월 10일 ||[[칼리굴라]]의 아버지, 클라우디우스의 형, 옥타비아(소)의 외손자 ||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드루수스(소)) ||B.C. 13년 ||23년 9월 14일 ||티베리우스의 외아들,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의 사위, 칼리굴라의 오촌당숙이자 고모부 || ||'''[[리비아 드루실라]] '''||B.C. 58년 1월 30일 ||29년 9월 28일 ||'''아우구스투스의 아내''','''고대 로마의 초대 아우구스타. '''티베리우스와 대 드루수스의 어머니, 게르마니쿠스와 소 드루수스, 클라우디우스의 할머니, 칼리굴라와 브리타니쿠스의 증조할머니 || ||[[대 아그리피나|빕사니아 아그리피나]] ||B.C. 14년 ||33년 10월 17일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 게르마니쿠스의 아내, 칼리굴라의 어머니, 네로의 외할머니 || ||[[네로 카이사르|네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 ||6년 ||30년 ||게르마니쿠스와 아그리피나의 장남, 칼리굴라의 첫째형, 클라우디우스의 조카, 네로의 외삼촌|| ||[[드루수스 카이사르|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 ||7년 ||33년 ||게르마니쿠스와 아그리피나의 차남, 칼리굴라의 둘째형, 클라우디우스의 조카, 네로의 외삼촌 || ||'''[[티베리우스]]''' ||B.C. 42년 11월 16일 ||37년 3월 16일 ||'''로마 제국 제2대 황제''' || ||[[소 안토니아|율리아 안토니아]] ||B.C. 36년 1월 31일 ||37년 9월 / 10월 ||아우구스투스의 조카,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의 아내, 게르마니쿠스와 클라우디우스의 어머니, 가이우스(칼리굴라)의 할머니 || ||'''[[칼리굴라|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 ||12년 8월 31일 ||41년 1월 24일 ||'''로마 제국 제3대 황제''' || ||율리아 리빌라 ||18년 ||41년 / 42년 ||게르마니쿠스와 아그리피나의 막내 딸, 칼리굴라의 여동생, 네로의 이모 || ||'''[[클라우디우스(황제)|클라우디우스]]''' ||B.C. 10년 8월 1일 ||54년 10월 13일 ||'''로마 제국 제4대 황제''' || ||[[브리타니쿠스]] ||42년 2월 12일 ||55년 2월 11일 ||클라우디우스의 외아들, 칼리굴라의 사촌동생 || ||[[포파이아 사비나]] ||30년 ||65년 ||네로의 아내 || ||'''[[네르바]]''' ||30년 11월 8일 ||98년 1월 27일 ||'''로마 제국 제12대 황제''' || -----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와 황족들이 묻히던 영묘답게 대부분의 아우구스투스의 일가들이 매장되어 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친딸 대 율리아, 외손주 소 율리아,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아우구스투스 생전 모든 상속권과 특권이 박탈[* 대 율리아는 아버지 명성에 [[불륜|먹칠을 한 대 사건을 저질렀기]] 때문에 아버지 생전에 먼 섬으로 귀양을 가서 쓸쓸히 죽었으며, 외손녀 소 율리아 역시 살아생전 외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와 사이가 나쁜데다 간통죄로 추방 후 섬에서 사망했다. 외손자인 포스투무스는 해당 문서 참조.]된 까닭에 사후에도 매장되지 못했고, [[네로]]에게 반역죄와 간통죄 누명을 뒤집어 쓰고 처형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두 딸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클라우디아 옥타비아]] 자매 역시 매장되지 못했다. 또한 [[세야누스]]와 불륜을 저지르며 남편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굶어죽게 만든 장본인 [[리빌라]]와 그녀의 딸 [[율리아 리비아]], 아들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는 당연히 이 곳에 매장되지 못했다. 이 왕조의 마지막 황제 [[네로]]는 본가의 개인 묘지에 매장됐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투스 일가에 입양됐음에도 살아있을 무렵 국가의 적으로 규정됐고, 탄핵 당시 아우구스투스 일가에게 벌인 행적이 범죄로 규정되어 그 자격이 박탈됐기 때문이다. 반면 [[네 황제의 해]] 이후 제위에 오른 황제인 [[갈바]],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비텔리우스]]는 개인 자격으로 개인묘지에 안장되거나(갈바, 오토), [[테베레강]]에 시신이 던져졌다.(비텔리우스) 이탈리아와 서양 학자들에 따르면 [[플라비우스 왕조]]의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두 아들은 모두 플라비우스 가문 개인 무덤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서기 [[98년]] 사망한 [[네르바]] 황제는 아우구스투스 일가가 아님에도 특이하게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매장됐다. 네르바가 묻히면서 영묘는 만원이 됐다고 하며, 네르바 다음 황제인 [[트라야누스]] 황제는 자신이 만든 트라야누스 포룸에 있는 원기둥[* 이 원기둥에는 그의 업적인 [[다키아 전쟁]]의 전 과정을 부조화하여 새겨넣었다.]에 황후와 함께 안장되었다. 반면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해당 영묘 확장 공사 대신 아예 [[테베레강]] 서안에 새로운 황제 묘를 건설하는데, 통칭 '[[하드리아누스 영묘]]'로 불리는 이 영묘는 로마 제국 멸망 이후에 [[교황청]]의 성채로 개조되어 오늘날에는 [[산탄젤로 성]](카스텔 산탄젤로)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